애니메이션

[애니 에피소드 리뷰] 인간이란 "무언가를 신앙하는" 존재이다. "지: 지구의 운동에 대하여" - 1분기 마지막에 나온 최고의 에피소드, 12화 "나는 지동설을 신앙하고 있다"

flyxiv 2024. 12. 18. 23:02

12화가 나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지: 지구의 운동에 대하여"는 나한테 이번 분기 최고의 작품이었다.

12화가 나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 지: 지구의 운동에 대하여" 9화: "분명 그것이, 무언가를 안다는 것이다"는 나한테 이번 분기 최고의 에피소드였을 것이다.

 

일요일 새벽, 1시 20분에 넷플릭스에 올라오자마자 "지: 지구의 운동에 대하여" 12화를 켰고, 보는 동안 입이 다물어진 적이 없다. 대사, 연출, 내용 빠질 것 없이 완벽했다.

 

3화 "저는, 지동설을 믿습니다", 9화 "분명 그것이, 무언가를 안다는 것이다" 에 이어 12화까지 강력한 에피소드를 들고 온 "지: 지구의 운동에 대하여". 앞으로 "지"는 세 번째 화마다 긴장해서 봐야겠다.

 

 


엄청난 연출과 액션이 아닌, 대사와 메시지만으로 전달하는 울림

애니는 "움직이는 것만 봐도 재밌어야 한다" 라고 많이들 얘기한다.

 

"지"는 그러한 관점을 부숴버리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대사와 성우연기를 빼고 작화만 본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작품이 되어버린다. "지"의 연출이 별로라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다른 작품들에 비해 그런 걸 뽐낼 공간이 많이 없다는 걸 말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지"라는 애니는 요즘 트렌드에 맞지 않는 것들 투성이다.

 

캐릭터의 외모도 요즘 트렌드와 다르고,  천동설/지동설, 수학, 신앙에 대한 지식까지 있어야 제대로 볼 수 있다. 

 

액션, 로맨스, 잘생기고 예쁜 캐릭터 등 단순하게 시청해도 재밌게 볼 수 있는 요소를 추구하는 요즘 애니메이션/만화와는 거의 반대편 지점에 있는 작품이다. 

 

 

이번 분기 최고로 히트한 두 작품, "단다단" 과 "지". 둘은 굉장히 상반되는 특징들을 보인다.

 

 

그럼에도 "지"는 매력적인 스토리, "금단"을 연구한다는 것에서 오는 만성적 긴장감, 몰입감 넘치는 대사, 그리고 인생에 대한 깊이 있는 메시지로 우리를 몰입시킨다. 

 

학술적이고 주제의식이 강한 무거운 애니가, 매니아들뿐만 아닌 대중에 큰 인기를 끌 수 있을까. "지"는 이것이 가능하다는 걸 증명한 작품이다.

 

이 애니메이션은 "지동설" 에 대해 다루는 것 같지만, 사실 지동설과 천동설에 대한 논쟁은 뒤에서 설명하는 것 처럼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더 본질적인 질문을 답하기 위한 매개체일 뿐이다.

 

1. 바데니와 노바크의 대비 - "잠재적 폭력성" 에 대하여

 

주인공 중 하나인 바데니. 매우 지성적인 캐릭터이지만, "신이 주신 명석한 두뇌로 이 세상에 발자취를 남기는 게 그 분의 뜻"일거라는 대사에서 알 수 있듯, 그의 학문적 열정은 그보다 더한 신앙적 열정에서 비롯되었고, 그 열렬한 신앙이 이단 사상인 지동설을 연구하게 한다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12화 첫 명장면은 목걸이때문에 들켰을 가능성을 알아챈 바데니가 밖에 불을 피워 그동안의 연구 기록을 지우는 쇼트다.

다른 분석에서도 잘 나와있지만, 이 작품에서 "자연, 파란색"은 기존 체제에서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진리, 그리고 "불, 붉은색"은 질서의 유지를 위해 그러한 진리를 억압하는 기득권층을 상징한다.

 

밤하늘의 "빛", 그리고 그 빛의 색깔인 "푸른색"은 "자연이 만들어내는 빛"으로, "주인공들이 추구하는 세상의 진리"를 나타낸다.
"불", 그리고 불의 색깔인 "붉은색"은 "인류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빛"으로, 푸른색으로 상징되는 진리를 인간이 만든 기존 체제의 틀 안에 "인위적으로 가두려고 하는" 기득권의 억압을 상징한다.

그렇기 때문에 원래 "불"은 오히려 바데니에 반대되는, 교회와 기득권층에서 사용하던 억압이었다. 이단 금서를 읽은 바데니의 오른쪽 눈을 멀게 한 것도 그에 대한 벌로 그의 눈에 지져진 촛불이었다.

 

그럼에도 위기에 닥친 지금, 그는 여러 사람들이 목숨을 바쳐 작성된 연구 자료들을 망설임 없이 태워버린다. 이를 지켜보는 오크지의 눈에는, 그 자료들이 있을 수 있게 했던 사람들의 마지막 모습들이 비춰진다.

 

오크지에게 지동설의 미래를 맡기며 죽은 그라스.
자신이 일생을 바쳐 연구한 "천동설"이 결국은 틀렸음을 인정하며, 바데니 일행에게 연구 자료를 넘겨준 피아스트 백작.

 

이 회상으로 바데니가 태우는 것은 자료뿐만 아니라 "목숨을 바쳐 진리를 추구한 자들의 흔적"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바데니의 "목적을 위한 잠재적 폭력성": 타인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려는 의지를 볼 수 있다. 

 

이러한 바데니의 성향은, 사실 8화 "이카로스가 돼야 한다"에서 자신이 낸 문제를 푼 게 여자인 게 밝혀졌을 때, 밀고당할 가능성이 적다며 안심하는 장면에서도 잘 나온다.

 

 

여자니까 만약 고발한다 해도 "마녀에게 홀렸다고" 하면 된다며 안심하는 바데니. "목적"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남을 희생시킬 각오가 되어있는 그의 모습은 "잠재적 폭력성"을 나타낸다.

 

 

 

원래 "폭력"이라하면 "물리적 폭력"이 떠오른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물리적 폭력"에 가장 가까이 서 있는 인물이 자신의 목적인 이단자들의 회개/자백을 위해 이단자들을 고문하는 "이단 심문관 노바크"이다.

 

이 작품의 악역인, 이단 심문관 노바크. 신앙적인 인물이며 지성적으로도 뛰어나지만, 바데니와 다르게 "성취"에 대한 큰 욕망이 없고 "신이 주신 역할에 맞게 사는 것"을 추구하는 게 특징이다.

 

고문을 못하겠다는 신입의 고문 도구를 다른 신입에게 건네는 장면에서, 그가 행하는 폭력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일 뿐임을 잘 나타낸다. 자신이 못한다 하면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누군가는 "내가 못한 내 역할"을 대신 해야 한다. 그러지 않기 위해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노바크는 그냥 보면 "폭력성" 스케일에서 가장 극단에 있어, 실제 폭력을 행하지 않은 바데니와는 큰 차이가 나는 인물로 보인다. 하지만 그가 행하는 폭력도 사실 자신의 목적이자 직업인 "이단의 회개/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목적을 위해 타인에게 폭력을 가할 의지"라는 면에서, 바데니가 지닌 잠재적 폭력성은 노바크와 같은 특징을 보인다.

 

이러한 폭력성은, 지동설을 위해 타인이 아닌 "자신"을 희생했던 오크지, 라파우와도 대조를 이룬다.

 

이 장면은 이렇게 "목적을 위한 잠재적 폭력성"으로 바데니를 노바크와 대비시키며, 지동설과 천동설 측을 대표하는 두 인물의 본질은 결국은 같은 곳에서 비롯되며, 이로 인해 두 진영의 대립은 단순한 "선악"의 구도가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그렇다면 여태까지 천동설이 핍박받는 약자처럼 표현해놓고, 이제와서 왜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일까? 그 답은 나중에 이번 화 가장 중요한 장면에 나온다.

 

 

 

 

2. "자신이 틀릴 가능성을 긍정하는 자세야 말로, 학문이나 연구에 중요한 자세다"

 

 

이것은 바데니에게 엄청나게 큰 지적이다. "절대 진리"란 바데니에게 "삶의 의미"이기 때문에, 오크지의 이 말은 사실상 "삶에 의미란 없다" 는 발언으로 이해해야 한다.

 

3. "저는 지동설을 신앙하고 있습니다" - 연구와 신앙, 진리와 감동, 지성과 감성 - 인생이란 무엇인가?

 

그에 대해 길게 얘기할 시간도 없이, "노바크"의 이단 심문관 마차가 그들 예상보다 빠르게 다가오고 있음을 파악한다. "5분" 밖에 남지 않아 도망치기도 어려운 상황, 오크지는 결심을 하고 검을 든다. 

 

"지동설"을 추구하는 각오로 칼을 든 오크지는 푸른색 불로 묘사된다.

 

작품 내내 오크지의 삶의 목표는 "천국에 가는 것"기 때문에, "삶의 의미"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알려준다.

 

 

자신에게 "감동"을 준 지동설을 지키기 위해 모든 걸 바칠 수 있다 말하는 오크지.
지동설에 대한 "감동" 으로 삶의 목표가 바뀐 오크지.
지옥은 "신학"을 배우지 못한 오크지 생각보다 안 좋은 곳이라며, 그의 결심에 반론을 거는 바데니.

 

 

자신이 믿는 "진리"가 틀릴 지 모르더라도, 그 감동을 위해 모든 걸 바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이다.

 

오크지의 결심을 들은 뒤, 그를 위해 기도해주는 바데니.

 

 

지동설의 "신도" 오크지를 위해 푸른 빛 아래 기도를 해주는 바데니. 아까 오크지의 배경이 푸른색이지만 작중에서 교회를 대표할 때 자주쓰이던 "불꽃" 모양이었던 이유는 이제 명확해진다. 진리라고 믿었던 "지동설" 또한 아무리 증거가 많아져도 결국엔 완전한 진리라고 확신할 순 없고 믿을 수만 있는, "종교"와 닮아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오크지의 "감동"에 대한 이야기는 3화 "나는, 지동설을 믿습니다" 의 라파우의 마지막 장면들을 떠올리게 하여 더 큰 울림을 준다:

 

목숨을 걸고 "감동"을 지키는 것. 라파우의 이때의 결심도 "신앙" 이었음을 이제 알 수 있다. 3화의 제목 "저는, 지동설을 믿습니다"도 이를 뒷받침한다.

 

 

4. "죽을 각오가 된 것"이 바로 신앙이다

 

그 후 나오는 노바크와 신입의 대화 시퀀스로 "신앙"의 의미는 더 구체화된다.

 

그렇다. 노바크의 대사로 메시지는 확실해진다.

 

"죽을 각오까지 할 수 있는 믿음"이야 말로 "신앙"인 것이다.

 

 

그리고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키고 싶은 것, 그걸 다르게 말하면, "살아야 할 이유" 이다. "삶의 이유"에 대한 "절대 진리"는 절대 알 수 없고, 다만 "각자가 진리라 믿으며 신앙하는" 자신만의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바데니와 오크지의 "연구"와 "감동"에 대한 시퀀스까지 이어버리면 "지성"으로는 "절대적인 삶의 의미"가 있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에게 가장 큰 울림"을 주는, "감성"이 이끄는 무엇인가를 진리로 믿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 그것이 삶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바데니에게 그것은 "신이 만든 세계의 아름다움을 증명할 절대 진리"이고, 오크지에게는 "이 세상은 천국만큼 의미가 있다고 믿게 해준 지동설"이고, 노바크의 "직무를 위해 목숨을 던질 각오"로 유추할 수 있듯, 그에겐 "그에게 주어진 일"이 그가 "신앙"하는 것이다.

 

선과 악은 없다. 옳고 그름도 없다. 지동설이 옳고 천동설이 틀린 것이 아니다. 지동설도 결국 "절대 진리"가 아니므로 100% 옳음을 확신할 수 없다. 바데니, 오크지, 노바크 모두 신이 아닌 인간이므로, 그들에게 "감동"을 주는것을 신앙하며 살아갈 뿐이다. 그것이 삶이다.

 

 

그리고 "죽을 각오가 된 녀석"이란 노바크의 말은 3화 "나는, 지동설을 믿습니다"의 노바크를 유일하게 압도했던, "지동설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된 라파우"를 떠올리기도 한다.

 

 

여태까지 유일하게 노바크를 압도했던, "지동설을 위해 죽을 각오를 한 라파우"

 

 

다시 한 번, 노바크 앞에 "죽을 각오를 한" 주인공 일행이 나타나 대치하며 12화는 종료된다. 오크지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땅에 꽂혀있는 오크지의 검은 "묘지"에 꼽힌 십자가처럼 보인다. 그가 이 곳에서 죽을 각오를 한 것을 암시한다.
교회 신도들이 목에 십자가를 메듯이, "지동설"을 신앙하는 "신도" 오크지는 이단자가 준 목걸이를 목에 건다.
노바크의 신앙과 오크지의 신앙의 대결을 암시하며 12화는 끝을 맺는다.

 

 

 

 

이처럼 12화는 작품이 던지던 많은 질문들에 대한 중요한 관점을 제공한다:

 

1) 여태까지 "선"으로 묘사되던 "지동설", "악"으로만 묘사되던 "천동설"의 기존 내러티브를 반전시킴

    * 바데니와 노바크의 "잠재적 폭력성" - 한 쪽이 본질적으로 악한 것이 아님.

    * 지동설 천동설 둘 다 결국 "절대 진리"일 수 없고, "종교"와 같은 "믿음"의 영역이다.

 

2) 인간이란 삶의 의미에 대한 "절대 진리"에 도달할 순 없지만, 각자 짧은 생동안 자신에게 "감동"을 주는 무언가를 "신앙"하며 살아간다.

 

그렇기에 이번 편이 여태 나온 "지" 중 최고의 에피소드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