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애니 분석] 걸즈 밴드 크라이 1. 3D도 연출로 지지 않는다, 10화: "반더포겔"

flyxiv 2024. 12. 11. 23:41

토에이의 "걸즈 밴드 크라이" 는 내게 2024년 중 단연 최고의 애니일 뿐만 아니라 여태 경험한 모든 게임/애니 중에선 "테일즈위버 에피소드 1/2" 다음으로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최고의 작품이다.

 

 

이 애니는 밴드를 모르는 사람이 그냥 봐도 재미있는 잘 만든 애니이지만, 특히나 대학교 시절 밴드활동을 했던 나에게는 이 작품의 라이브씬의 고증 및 주제 의식이 훨씬 크게 다가왔다.

 

수많은 애니 유튜버들이 이 작품의 3D 퀄리티, 진지한 스토리 등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부분에 대한 설명은 더 필요 없을 것 같다.  여기선 한 단계 더 깊게 들어가 "걸즈 밴드 크라이"의 스토리 및 연출을 자세히 분석하여, 이 작품을 더 잘 이해하려고 한다.

 

 

1. "걸스 밴드 크라이" 1기 최고의 화는 무엇인가?

보통 요즘 나오는 애니메이션은 중반을 넘어선 7-9화 쯤에서 분기 내 인기를 결정지을 최고의 에피소드를 배치한다.

 

이번 분기 방영한 "단다단"의 7화가 그러했고, "지: 지구의 운동에 대하여"의 9화도 "삶은 헛된 것이 아니다" 라며 앞에선 희망차게 외치지만, 뒤에선 "죽음"이 갖고 있는 본질적인 허무함, 두려움을 완전히 떨쳐낼 순 없어 씁쓸한 미소를 훔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그 감정을 디테일하게 묘사한 최고의 화라고 생각한다.

 

 

이번 분기를 넘어서 이번 해 최고의 에피소드로 평가받는 "단다단" 7화의 시퀀스. 이미 온 세계에서 극찬을 하는 화 설명은 생략한다.

 

한평생 몸바쳐 연구한 "천동설"이 사실은 틀렸음을 깨달은 피아스트 백작이, 자신의 시대가 끝났음을 인정하고 다음 시대를 이끌 주인공들에게 열쇠를 건내지만, 차마 열쇠에서 손을 놓치 못하며 오열하는 장면은 "지: 지구의 운동에 대하여"의 최고의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걸즈 밴드 크라이"도 이 공식을 따른다. 8화 "만약에 너가 운다면" 은 서로 다른 가치관과 배경으로 갈등하던 다섯 멤버들이 모든 갈등을 해소하고 하나의 "밴드"로 완성되는, 가장 임팩트있고 기승전결이 완벽한 에피소드다.

 

 

살아님기 위해 기존 인디 밴드 스타일을 버리고 아이돌 밴드로 노선을 튼 전 멤버들을 아직도 아끼는 걸 느낄 수 있는 외침 시퀀스

 

결국 두려움을 피하지 않고 직격으로 마주하기로 결심하며, 참아왔던 울음을 터뜨리는 모모카의 시퀀스는 "걸즈 밴드 크라이" 1기의 클라이맥스다.

 

하지만 나에게 "걸즈 밴드 크라이"에서 가장 좋아했던 에피소드가 뭐냐고 물어본다면 8화(만약에 너가 운다면) 9화(이지러진 달이 나왔다) 10화(반더포겔) 이 중후반 3부에 동점을 주고 싶다. 

 

앞서서 말했듯이 7-9화 쯤에서 클라이맥스를 찍는 것이 요즘 애니의 정해진 공식이라면, 그 클라이맥스 다음 화는 조금 쉬어가는 화가 되는 것도 그 공식의 따름 정리이다.

 

"단다단" 8화도 가벼운 분위기의 재밌는 에피소드였고, "지" 10화도 비교적 잔잔한 서사였다(물론 재미가 없었다는 건 아니다. 둘 다 제작진 기본 실력이 있기에 퀄리티는 절대 안뒤진다).

 

하지만 "걸즈 밴드 크라이"는 멈추지 않고 풀악셀을 밟는다.

 

원래 "걸즈 밴드 크라이"는 홀수마다 라이브씬을 넣는다.

 

하지만 9화는 홀수 에피소드 중 유일하게 라이브씬을 제외해버렸고, 대신 거기서 아낀 작업력으로 바로 연출쪽 디테일에 2배의 정성을 들여 밴드, 그리고 삶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들을 전달한다. 

 

치열한 경쟁을 하는 팀을 두 개나 운영하는 내 입장에선 그러한 팀의 컴플렉스를 자세하게 다룬 9화가 훨씬 더 느끼는 게 많았지만, 일반적인 관점에선 10화 "반더포겔"이 보여준 연출과 메시지가 훨씬 더 와닿는다고 생각한다.

 

2. 10화 "반더포겔"의 조명을 이용한 연출 - "가족"이란 무엇인가

 

10화는 그냥 봐도 "서로를 이해 못하던 가족이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따뜻하고 기승전결이 뚜렷한 잘 만든 에피소드이다.

 

하지만 "조명, 빛과 어둠을 통한 유대감 및 감정선 묘사" 라는 10화 연출의 핵심 포인트로 각 장면을 해석해보면 훨씬 더 이 에피소드의 메시지가 크게 다가올 것이다.

 

연출 포인트 1) 빛은 "가족"의 유대를 상징하고, 어둠은 그와 멀어지는 것을 상징한다

니나의 집이 10화에서 처음으로 나오는 장면. "니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누나의 방만 빛이 들어온다.

 

 

처음 나온 가훈의 쇼트는 조명을 밝게 받고 있다. 니나에게 아직 "가훈"은 자신의 가족을 정의하는 큰 요소이다.

 

 

여기서 검정고시를 포기하고 "밴드"를 하겠다는 니나를 이해해보려 노력하는 어머니와 누나는 같은 방, 밝은 조명 아래 있고, 이에 반발하는 것처럼 보이는 아버지는 완전 반대의 연출을 보여준다.

 

 

 

이 쇼트는 좋은 연출로 가득찬 10화 중에서도 조명/구도 하나하나 버릴 게 없을 정도로 잘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이후 니나에게 하는 말은 전부 논리적으로 "옳은" 말이다:

* 자퇴하는 대신 대학은 가겠다고 해 놓고 니나는 이걸 어겼다. - 어머니가 속상할 이유는 충분하다.

니나는 혼자 다 했다고 하지만, 사실 가와사키에 구한 집도 부모님의 도움으로 얻을 수 있던 것이다.

* 결국 니나는 아직 미성년이고, 어른의 보살핌이 아직 필요한 나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핵심 주제, "옳은 것만이 정답은 아니다"  처럼 "정답"으로 보이진 않는다. 그런 말을 할 때의 아버지의 조명은 밝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그런 말을 듣다 지쳐 가족에게 자신을 이해시키기를 거의 포기한 니나가 방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아버지가 가족과 자신을 나누고 있던 미닫이문을 열고 처음으로 같은 쇼트에, 처음으로 밝은 조명에서 같이 나온다.

 

이 쇼트의 주 액터인 니나와 아버지는 당연하지만, 어머니와 누나의 표정도 현재 상황에 어울리게 디테일이 살아있다. 이게 장인정신이다.

 

 

다음 날, 자신이 자퇴했던 학교에 가는 길이라는 걸 깨달은 니나의 쇼트.

 

각 인물의 배치가 너무 훌륭하다.

1) "현재의 니나"와 "아버지"는 같은 의자지만 최대한 먼 좌석에 앉아있다.

2) "과거의 니나"와 "현재의 니나"는 서로 같은 칸 맞은편에 서 있다.

3) 아버지는 "과거의 니나"와 제일 멀리, 완전 동떨어진 칸 및 좌석에 앉아있다. 니나가 학창시절 힘들 때 아버지의 태도에 얼마나 거리감을 느꼈는지를 암시한다.

 

 

열차에서 내린 뒤, 정류장의 그림자로 어둡던 아버지가 그늘을 벗어나 빛을 받게 되는 순간 다음 대사가 시작된다.

 

 

 

 

다음 쇼트에선 항상 밝은 조명이었던 니나와 어두운 조명이었던 아버지가 처음으로 반전이 된다. 

 

 

이는 학교 교무실에 가서도 마찬가지이다. 니나가 당한 학교폭력(이지메)에 대한 책임을 적극적으로 묻는 아버지의 조명은 밝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소극적인 니나는 어두운 조명이다.

 

조명의 반전처럼, 니나는 몰랐던 아버지의 노력들이 조명된다.

 

귀가 후, 누나를 통해 엄마 아빠가 얼마나 자신을 위해 고민했는지를 듣는 니나. 그러한 진심을 알게된 니나는 "가훈"으로 대표되는 엄격한 집안이 아닌, 자신을 이해해주는 "가족"을 

가훈 "저녁 식사는 반드시 집에서 가족이 모여서 한다"를 깨도 되냐고 물어보는 니나
니나가 당한 일들을 해결할 방법을 열심히 찾고 있었던 아버지.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한다 생각하지만, 누구보다 니나의 편에 있었던 가족들

 

 

 

다음 날, 에피소드 처음 나왔던 조명 가득한 가훈과 수미상관을 이루는 어두운 가훈

가훈도 결국엔 "가족"의 유대를 위해 필요하지 않을까 해서 아버지가 만든, "가족"을 만들기 위한 아버지의 고민 중 하나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해결책"들은 결국엔 "정답"이 아니었다. 좁혀지지 않는 니나와의 거리는 에피소드 후반부 니나가 좋아하는 곡을 같이 좋아해주고, 잘 다녀오라는 안부, 이런 상대적으로 간단한 "이해, 공감"으로 해결된다.

자신을 살아있게 해준, "빈 상자"를 듣는 아버지. 늘 그래왔듯 이해해줄 리 없다 생각하며 저항할 준비를 하는 니나.

 

아버지가 "빈 상자"를 칭찬하자, 니나의 조명이 밝아진다.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네 가족이 한 번에 들어온 쇼트. 저항선도 완전히 사라진 니나. 아빠와 니나의 상하가 완전 수평이 됨.

 

 

원래는 집에서 이야기를 해본 뒤 밴드를 하기로 한 자신을 이해하기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에, 가족과 연락을 끊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길을 혼자서 끝까지 가려고 결심했던 니나. 하지만 결국은 가족과 화해하게 되고, 비로소 "어른의 보살핌이 필요한 미성년" 처럼 자신이 필요했던, 의지할 곳을 찾게 된다.

 

처음엔 그럼에도 의지를 다지기 위해 박차고 나가는 것 처럼 보인다. 이 마치 2D 횡스크롤을 보는 것 같은 카메라 앵글도 너무 좋다.

 

 

 

 

3. 10화 "반더포겔"의 수미상관을 이용한 연출 - "어른", 그리고 "성장"에 대하여

이렇게 조명이 열심히 갈등을 겪던 가족이 어떻게 다시 하나로 연결되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10화는 "이전 에피소드와의 수미상관"을 통해 니나가 집에서의 일들로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보여준다.

 

 

처음으로 등장하는 수미상관은 누나가 무릎베개를 권하는 장면이다

 

 

 

니나를 이해하면서도 "밴드"라는 어려운 길을 꼭 걸어야겠냐며 걱정하는 누나의 무릎 거부. 침대상으로 구도를 좌우로 나누는 것도 기발하다.

 

 

위에서 가족과 화해한 뒤 다시 가와사키로 오는 시퀀스도 1화와 수미상관을 이룬다. 장면의 위치는 같지만 조금씩 바뀐 늬앙스가 니나가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전달한다.

 

 

 

 

다음 폰 쇼트는 더 중요한데,

1) 에피소드 초반엔 한 줄도 못썼던 "공허와 카타르시스" 작사를 끝냈다 - 가족과의 갈등이 해소됐음을 암시

2) 삶에 대한 열정의 원천이 남의 노래가 아닌 내 노래로 바뀜.

3) "남"의 노래를 "듣는" 게 아닌, "내" 노래를 "만드는" 주체성의 변화. 

 

이렇게 여러 가지 방면에서 니나의 성장을 암시한다.

본인이 살아갈 이유 - 다른 그룹의 곡이었던 "빈 상자" 에서 내가 부를 노래인 "공허와 카타르시스"로 바뀐 모습.

 

 

사람들 사이에서 주눅들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 걱정하던 멤버들의 마중까지, 겨울이 지나 철새는 다시 돌아왔다.

1화 모모카의 라이브를 들으러 가던 장소에 멤버들이 마중 나와있는 모습

 

 

 

 

 

 

10화 "반더포겔"은 이처럼

1) 하고싶은 건 많지만 현실 부딫혀 때때로 좌절하는 "미성년"에게 필요한 진정한 "보살핌", 그리고 "가족"의 의미. 

2) "옳은" 것만이 "정답"은 아니라는 주제와의 연결

3) 주인공 니나의 정신적 성장

 

이라는 여러 주제를 한 편 안에서 깔끔한 기승전개로 담아낸 에피소드다. 최근 일본 애니메이션에는 이세계 같은 허무맹랑한 요소가 아닌,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이라면 공감할만한 현실적인 소재와 갈등을 그려내는 작품이 많아지고 있어 나도 요즘 챙겨보는 작품이 많아지고 있다. 이번 분기만 해도 낚시의 느긋함을 테마로 한 "네거포지 앵글러", 지식과 인생의 의미에 관해 고찰하는 "지: 지구의 운동에 관하여", 팔방미인인 "단다단" 등 좋은 작품들이 많이 쏟아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작품들을 이렇게 한 쇼트마다 자세히 관찰하며, 작은 사물 하나까지 의미 전달을 위해 세심하게 배치한 애니메이션 회사의 프로 정신을 보고 있으면 내일의 일도 타협하지 않고 그들처럼 완벽하게 해내고 말겠다는 열정을 얻곤한다.